
민화에서 꽃을 제일 좋아합니다.
동물도 그리고 산수도 그리고 문자도도 그리지만, 결국 돌아오는 자리가 꽃입니다. 그중에서도 모란이 제일입니다. 사군자 중에서는 매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오래 그리다 보면 소재에 애정이 생기는데, 이 두 꽃은 10년째 질리지 않습니다.
왜 이 꽃들이 민화에서 그렇게 많이 그려졌는지, 그리고 각각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정리해봤습니다.
모란 - 꽃의 왕, 가장 솔직한 꽃
모란을 처음 그렸을 때가 기억납니다.
민화를 시작하고 첫 번째 과제로 받은 소재가 모란이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꽃. 붉은 꽃잎이 겹겹이 쌓이는 구조. 처음엔 어떻게 저 많은 꽃잎을 다 표현하나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리면 그릴수록 빠져들었습니다.
모란은 부귀영화를 상징합니다. 꽃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크고 화려하게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민화에서 가장 솔직한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자 되고 싶다, 풍요롭고 싶다는 마음을 그대로 담은 꽃입니다. 돌려 말하지 않습니다.
모란도를 그릴 때 색을 쌓는 과정이 핵심입니다. 한 번에 진한 색을 올리지 않습니다. 연한 색부터 시작해서 겹겹이 올려야 꽃잎에 깊이가 생깁니다. 그 과정이 번거롭지만 완성됐을 때 화면이 확 살아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란을 계속 그리게 됩니다.
연꽃 - 항상 청초하게 그리고픈 소재
연꽃은 청정함의 상징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더럽혀지지 않는 꽃. 불교적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다시 시작하는 생명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연화도를 그릴 때마다 이 꽃이 왜 오래 사랑받았는지 알게 됩니다.
연꽃 색 그러데이션이 연화도의 핵심입니다. 분홍에서 흰색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 너무 급하게 넘어가면 어색하고, 너무 흐리면 힘이 없습니다. 그 균형을 잡는 게 연꽃을 오래 그려도 매번 집중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매화 - 겨울 끝에 피는 꽃
사군자 중에 매화를 제일 좋아합니다.
매화는 추운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피어납니다. 눈 속에서 피는 꽃. 그 이미지 자체가 좋습니다. 새로운 시작, 희망, 추위를 견딘 끝에 오는 것.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군자를 그릴 때 매화는 붓의 탄력이 중요합니다. 가지의 꺾이는 선, 꽃술 하나하나. 세필로 꼼꼼하게 그리는 것보다 붓에 힘을 실어서 과감하게 그어야 매화 특유의 기세가 삽니다. 처음엔 그게 잘 안 됐습니다. 너무 조심스럽게 그리면 매화가 아니라 그냥 가지 그림이 됩니다.
국화 - 가장 끝까지 남는 꽃
국화는 늦가을까지 피어 있는 꽃입니다.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나서도 혼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절개와 고결함의 상징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꽃. 사군자 중에서 국화를 그릴 때 꽃술 표현이 가장 손이 많이 갑니다. 촘촘하게 올라오는 꽃술 하나하나를 세필로 표현해야 하는데, 성격 급한 날은 건너뛰고 싶어집니다.
민화에서 꽃이 많이 그려지는 이유
꽃은 색이 풍부합니다.
민화의 화려한 색채 감각과 꽃이 잘 맞습니다. 붉은 모란, 분홍 연꽃, 흰 매화, 노란 국화. 오방색 체계 안에서 꽃만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소재가 없습니다.
그리고 꽃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복잡한 상징을 몰라도 꽃 그림 앞에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집 안에 걸어두면 공간이 밝아집니다. 민화가 생활 속 그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꽃이 가장 많이 그려진 게 당연합니다.
모란을 그릴 때마다 이 그림 받는 사람이 풍요로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매화를 그릴 때는 이 그림 보는 사람이 겨울을 잘 버텼으면 싶습니다. 꽃을 그리는 건 소망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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