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를 그리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그냥 그림 그리는 건데, 자꾸 좋은 마음이 생깁니다. 모란을 그릴 때는 이 그림 받는 사람이 풍요로웠으면 좋겠다 싶고, 십장생을 그릴 때는 부모님 생각이 나고, 연꽃을 그릴 때는 이 그림 앞에 앉는 사람이 편안했으면 싶습니다.
왜 그럴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민화가 원래 그런 그림이었기 때문입니다.
길상이란 무엇인가
민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가 길상(吉祥)입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길상입니다. 민화는 처음부터 이 마음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림입니다. 궁중 회화가 미적 완성도를 강조했다면, 민화는 소망을 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집 안에 걸어두는 그림이었으니까요.
부자가 되기를, 오래 살기를, 자손이 번성하기를, 집안이 평안하기를. 이 바람들이 그림 속 상징으로 들어왔습니다. 모란은 부귀, 석류는 다산, 복숭아는 장수, 박쥐는 복. 그림이 곧 기도였습니다.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
처음 민화를 배울 때는 이 상징들을 외웠습니다.
모란은 부귀영화, 학은 장수, 원앙은 부부금술. 지식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래 그리다 보니 달라졌습니다. 외우는 게 아니라 그리면서 그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화조도를 그릴 때 원앙 한 쌍을 그리면서 이 그림을 받을 부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진짜로 생깁니다. 억지로 만들어낸 마음이 아닙니다. 그냥 붓을 움직이다 보면 그 마음이 따라옵니다.
아마 수백 년 동안 이 소재들에 그런 마음이 담겨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소재 자체에 마음이 쌓여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리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그 마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민화 속 길상의 종류
민화의 길상 상징을 크게 나누면 네 가지입니다.
복을 바라는 것, 장수를 기원하는 것, 다산과 번성을 원하는 것, 보호를 바라는 것. 이 네 가지가 민화 소재 대부분을 이룹니다.
복은 오복도, 박쥐도에 담겼습니다. 박쥐가 복을 상징하는 이유가 한자 복(福)과 발음이 비슷해서인데, 이런 언어적 유희가 민화에 자주 쓰입니다. 장수는 십장생도, 복숭아도, 학도에 담겼습니다. 다산은 포도도, 석류도, 백동자도. 보호는 산신도, 사신수, 관음도, 약사도가 맡았습니다.
이 소재들을 죽 늘어놓으면 삶의 전체가 보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가족이 번성하고, 복이 들어오고, 위험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마음. 민화가 삶의 지도였습니다.
소망이 그림이 된 이유
왜 말로 빌지 않고 그림으로 그렸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림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은 흩어지지만 그림은 벽에 남습니다. 매일 보입니다. 매일 그 소망이 공간 안에 있습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기운이 집 안에 머뭅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모란꽃이 크게 피어있으면 풍요롭다는 걸 누구나 알았습니다. 상징이 언어보다 직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민화는 모두의 그림이 됐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민화를 그리면서 왜 자꾸 좋은 마음을 담게 되는지 이제는 압니다.
민화가 원래 그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담는 그림.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그림. 수백 년 동안 그 마음이 소재 안에 쌓여왔고, 붓을 들면 그 마음이 따라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바랐던 것과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고, 가족이 평안하기를 바라고, 복이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민화가 지금도 낡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마음이 생긴다는 게 처음엔 이상했는데, 그게 민화를 제대로 그리고 있다는 신호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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