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를 처음 시작할 때 저는 모란도로 시작했습니다.
화사하고 풍성한 꽃 그림으로 첫 붓을 잡았는데, 그게 1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민화를 처음 배우는 분들을 보면 시작점이 달라졌습니다. 모란도보다 복(福) 문자도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저도 엄마한테 민화를 처음 가르쳐줄 때 복 문자도를 선택했습니다. 이게 첫 그림으로 딱인 이유가 있습니다.
오복이란 무엇인가
오복(五福)은 다섯 가지 복을 말합니다. 장수(長壽), 부귀(富貴),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오래 살고, 재물이 있고, 몸과 마음이 평안하고, 덕을 행하고, 편안히 생을 마치는 것.
이 다섯 가지를 보면 조선 시대 사람들이 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니라, 어떤 복을 어떻게 바라는지가 분명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오복 안에 덕(德)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돈이나 건강만 나열한 게 아니라 덕을 좋아하고 행하는 것도 복으로 봤습니다. 복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도 복의 일부라고 생각한 겁니다. 욕심만이 아니라 태도까지 담은 목록입니다.
왜 글자를 그림으로 그렸을까
오복도는 특이한 민화입니다. 꽃도 동물도 아닌 글자를 그립니다.
복(福)이라는 글자 자체를 화면 중심에 올려놓습니다. 하나만 그리기도 하고, 화면 가득 수십 개를 반복해서 채우기도 합니다. 이게 왜 그림이 될까 싶지만,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글자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습니다. 글자에 뜻이 담기고, 뜻은 기운을 머금는다고 믿었습니다.
복자를 집 안에 두는 것은 복의 기운을 직접 공간에 들여오는 행위였습니다. 빗대어 표현하지 않고 곧장 불러들이는 방식입니다. 박쥐로 복을 상징하거나, 석류로 번성을 암시하는 것과 달리 오복도는 직설적입니다. 복이라고 쓰면 복이 오는 것입니다.
화면 가득 복자를 채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니까 여러 번. 그 간절함이 그대로 그림이 됩니다.
엄마한테 복 문자도를 가르친 이유
엄마가 민화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을 때 뭘 먼저 가르쳐드릴까 잠깐 고민했습니다.
모란도는 꽃잎 층위를 쌓는 게 처음엔 어렵습니다. 화조도는 새 표현이 까다롭습니다. 복 문자도는 다릅니다. 처음 붓을 잡는 분도 비교적 빠르게 완성할 수 있습니다. 글자 형태를 잡고, 색을 올리고, 주변을 꾸미면 됩니다. 작은 화판에 소품으로 그리면 한두 시간 안에 완성됩니다.
그러면서도 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처음 그린 그림이 그냥 연습용 그림이 아니라, 집에 걸어둘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 됩니다. 그 뿌듯함이 민화를 계속하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엄마가 첫 복 문자도를 완성하고 거실에 걸어두셨습니다. 직접 그린 그림이 처음 집 벽에 걸리는 순간이 있는데, 그게 민화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이유가 됩니다.
소품 민화로 딱인 이유
요즘 복 문자도가 입문 소재로 인기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크게 그릴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화판에 아담하게 그려도 됩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완성됐을 때 선물하기도 좋습니다. 복이라는 글자 하나가 담긴 작은 그림 하나가 생각보다 훨씬 의미 있는 선물이 됩니다.
저도 복 문자도 소품을 종종 그립니다. 누군가에게 새해 선물로 드릴 때, 이사 선물로 드릴 때. 빠르게 그릴 수 있으면서도 마음이 담기는 그림입니다. 처음 배우는 분들이 복 문자도로 시작하는 게 이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 것 같습니다.
복을 담은 다섯 가지
오복 중에 어떤 복이 가장 중요하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오래 살면서 아프면 소용없고, 부귀가 있어도 마음이 불안하면 의미가 없고, 건강해도 덕이 없으면 공허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복 문자도 하나를 그리면서 이 다섯 가지를 다 담는다고 생각하면 그림이 달라 보입니다. 그냥 예쁜 글자 그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한 바람을 담은 그림입니다.
엄마가 거실에 걸어두신 그 복 문자도 앞에서 가끔 생각합니다. 다섯 가지 복이 다 있는 삶. 거창한 바람 같지만, 사실 가장 기본적인 바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