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를 그리다 보면 계절을 두 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밖은 한겨울인데 화면 안에는 꽃잎이 날리고 있습니다. 손은 차갑고 창밖엔 눈이 올 것 같은데, 붓 끝에서는 분홍 꽃잎이 하나씩 피어납니다. 화훼도를 그릴 때의 그 느낌이 좋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먼저 불러오는 것 같은 기분.
그래서 화훼도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민화 주제입니다.
화훼도란 무엇인가
화훼도는 꽃과 풀, 나무 등 식물을 중심 소재로 그린 민화입니다. 화훼(花卉)는 꽃과 초목을 뜻합니다.
민화에서 화훼도는 가장 널리 그려진 주제 중 하나입니다. 특정 계층이나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꽃이라는 소재 자체가 워낙 직관적이고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화훼도 속 꽃들은 그냥 예쁜 꽃이 아닙니다. 꽃마다 담긴 의미가 있고, 어떤 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가 달라집니다. 모란은 부귀, 연꽃은 청정, 매화는 절개, 국화는 장수. 화훼도는 꽃을 통해 삶의 바람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겨울에 꽃을 그린다는 것
화훼도를 그리다 보면 계절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1월에 모란을 그리고 있으면 창밖의 겨울이 잠깐 잊힙니다. 화면 안에서 꽃이 피어나고 꽃잎이 화사하게 펼쳐지는 걸 표현하고 있으면, 몸이 그 봄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리고 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조선 시대 사람들도 비슷한 이유로 집 안에 꽃 그림을 걸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 꽃이 없는 계절에도 꽃 그림을 통해 그 기운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 화훼도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도 유효한 방식입니다.
꽃잎을 날리는 그림
화훼도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구성이 꽃잎이 날리는 장면입니다.
활짝 핀 꽃에서 꽃잎 몇 장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 정지된 그림인데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꽃잎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바람의 방향도 느껴지고, 계절의 절정에 있는 그 순간이 담기는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을 그릴 때 가장 신경 쓰는 게 꽃잎의 방향과 크기입니다. 같은 방향으로만 날리면 인위적으로 보이고, 너무 제각각이면 어수선합니다. 바람에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배치하는 게 화훼도에서 제가 가장 즐기는 부분입니다.
공간에 따라 꽃이 달랐다
화훼도를 배우면서 흥미로웠던 게 공간마다 거는 꽃이 달랐다는 겁니다.
안방에는 다산과 화목을 상징하는 꽃을 걸었습니다. 모란이나 연꽃 같은 풍성하고 둥근 꽃들입니다. 사랑방에는 절개와 품격을 상징하는 꽃을 선택했습니다. 매화나 난초처럼 단정하고 절제된 꽃들입니다.
그냥 예쁜 꽃 그림을 아무 데나 건 게 아니라,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화훼도는 공간의 의미를 완성하는 그림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꽃을 어디에 걸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화훼도를 그리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
화훼도는 그리는 동안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입니다.
다른 소재들은 그리는 과정이 긴장되거나 집중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용호도나 봉황도는 기세와 균형을 계속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런데 화훼도는 다릅니다. 꽃잎 하나를 그리고 나서 잠깐 멈추면 이미 예쁩니다. 한 송이가 완성됐을 때의 만족감이 다른 소재와 다릅니다.
색을 올리는 과정도 즐겁습니다. 분채를 겹겹이 쌓으면서 꽃잎의 색이 깊어지는 것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기명절지도에서 색 쌓는 재미를 알게 됐다면, 화훼도에서는 색이 꽃처럼 피어나는 재미를 느낍니다.
겨울에도 봄 꽃을 그릴 수 있다는 것. 화훼도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