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를 배우는 분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부모님 환갑 선물로 뭘 그려드리면 좋냐고. 어버이날에 뭐가 어울리냐고. 그때마다 장수 상징 소재들을 설명하는데, 생각보다 헷갈려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학이 장수인지 봉황이 장수인지, 사슴이 왜 거기 나오는지.
저도 처음 배울 때 헷갈렸습니다. 정리해봤습니다.
민화에서 장수가 중요한 이유
민화 소재 중 장수 상징이 유독 많습니다.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자체가 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수를 기원하는 그림이 집 안에 꼭 필요했습니다. 오복 중에도 수(壽)가 들어갑니다. 오래 사는 것이 복 중의 복이었습니다.
부모님 장수 선물로 민화를 그려드리는 전통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저도 어머니 환갑 때 장생도를 그려드렸습니다. 완성하고 드렸을 때 오래 사셔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빌었던 기억이 납니다.
학 — 장수 상징의 대표
장수 소재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학입니다.
오래 사는 새로 알려져 있고,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이기도 합니다. 십장생에도 들어가고, 장생도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학이 있는 그림은 장수 기원이라고 보면 거의 맞습니다.
민화에서 학을 10년째 가장 많이 그립니다. 흰 몸에 붉은 정수리. 단순한 색 조합인데 흰색 표현이 항상 어렵습니다. 아직도 학을 그릴 때는 긴장합니다.
거북 — 느리지만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은 장수와 안정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오래 사는 동물이기도 합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오래 살아간다는 이미지가 장수 상징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장생에서 거북은 물가나 바다에 등장합니다. 현무도의 거북과는 다른 맥락입니다. 현무는 사신으로서 북쪽을 지키는 존재이고, 십장생의 거북은 순수하게 장수를 상징합니다.
사슴 — 불로초를 찾는 동물
사슴이 장수 상징인 이유가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사슴이 불로초를 찾아다니는 동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선 세계와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슴이 있는 그림은 장수와 함께 신선적인 분위기를 만듭니다. 학과 사슴이 함께 나오면 장수 기원 그림 중에서도 격이 올라갑니다. 부모님 선물로 이 조합이 자주 쓰이는 이유입니다.
소나무 — 사계절 변하지 않는 것
소나무는 겨울에도 푸릅니다.
변하지 않는 생명력. 그게 소나무가 장수를 상징하는 이유입니다. 눈이 쌓여도 가지가 꺾이지 않고 푸른 빛을 유지하는 소나무. 그 모습이 장수하는 사람의 기개와 닮아 있습니다.
산수민화에서 소나무를 그릴 때 솔잎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게 손이 많이 갑니다. 그런데 그 수고로움이 완성됐을 때 화면에 힘을 줍니다.
복숭아 — 신화 속 불로장생의 열매
복숭아가 장수 상징인 게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알고 보니 중국 신화에서 서왕모의 복숭아가 불로장생의 열매였습니다. 3000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를 먹으면 불로불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신화가 민화로 들어온 것입니다. 해학반도도에서 복숭아와 신선이 함께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숭아 색 표현이 은근히 까다롭습니다. 분홍빛이 너무 강하면 달아 보이고, 너무 약하면 밋밋합니다. 살구색에서 분홍으로 넘어가는 그 그러데이션이 복숭아도의 핵심입니다.
십장생이 소재를 모은 이유
십장생도는 장수 상징 소재를 한 화면에 모은 그림입니다.
해, 산, 물, 소나무, 거북, 학, 사슴, 구름, 불로초, 대나무. 열 가지가 한 화면에 들어갑니다. 각각 따로 기원하던 것들을 한 번에 담은 것입니다. 그래서 십장생도는 장수 기원 그림 중에서 가장 포괄적입니다.
십장생도 구도 잡는 게 민화 중에서 가장 어렵습니다. 열 가지 소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이 나면 안 됩니다. 처음 십장생도에 도전했을 때 구도만 잡다가 스케치를 여러 장 버렸습니다.
부모님께 그림 드릴 때
장수 상징을 알면 선물할 그림을 고르기가 쉬워집니다.
간단하게 드리고 싶다면 학도나 노안도. 학 한 쌍이나 기러기가 있는 그림입니다. 조금 더 정성을 담고 싶다면 장생도. 학과 사슴, 소나무가 어우러진 그림입니다. 가장 정성이 들어가는 건 십장생도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마음이 담깁니다.
어머니 환갑에 장생도를 그려드렸을 때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완성하고 드리면서 이 그림에 담긴 마음이 전달됐으면 했습니다. 장수 상징을 그리는 건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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