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를 배우면서 처음엔 이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선생님들이 색을 고를 때 그냥 예쁜 색이 아니라 방향을 따졌습니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중앙은 황색. 왜 색에 방향이 있는 거지? 그냥 보기 좋게 쓰면 안 되나?
사신을 그리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룡이 파란 이유, 백호가 흰 이유, 주작이 붉은 이유, 현무가 검은 이유. 이게 다 연결돼 있었습니다.
오방색이란 무엇인가
오방색은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색입니다.
동쪽 청(靑), 서쪽 백(白), 남쪽 적(赤), 북쪽 흑(黑), 중앙 황(黃). 이 다섯 색이 오방색입니다. 색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방향, 계절, 오행, 오장육부까지 연결된 하나의 체계입니다.
동쪽 청색은 봄, 목(木)의 기운, 시작. 서쪽 백색은 가을, 금(金)의 기운, 결실. 남쪽 적색은 여름, 화(火)의 기운, 절정. 북쪽 흑색은 겨울, 수(水)의 기운, 저장. 중앙 황색은 토(土)의 기운, 중심과 균형.
사신을 공부하면서 이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룡이 파란 이유는 동쪽이라서입니다. 백호가 흰 이유는 서쪽이라서입니다. 주작이 붉은 이유는 남쪽이라서입니다. 현무가 검은 이유는 북쪽이라서입니다. 색이 그냥 예쁘라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왜 어르신들이 방향을 따지는가
민화 화실에서 어르신들이 색을 고를 때 방향을 따지는 걸 자주 봤습니다.
처음엔 그냥 전통이니까 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체계가 집 안에도 적용됐습니다. 동쪽 방향에 어떤 색을 쓰고, 어떤 그림을 걸지가 오방색 체계와 연결됩니다. 색에 방향이 있고, 방향에 의미가 있고, 의미에 따라 어떤 기운을 들일지가 달라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십장생도를 어디에 거느냐, 사신 병풍을 어떻게 배치하느냐. 이런 것들이 다 이 체계 안에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방향을 따지는 게 미신이 아니라 수백 년 된 세계관이었습니다.
민화 색이 화려한 이유
민화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색이 너무 화려하다고.
맞습니다. 민화는 색이 강렬합니다. 그런데 그냥 화려한 게 아닙니다. 오방색이 기본 틀이 되기 때문입니다. 청, 적, 황, 백, 흑 다섯 색이 민화 색채의 뿌리입니다. 이 다섯 색이 조화를 이룰 때 민화 특유의 선명하고 강한 색감이 나옵니다.
실제로 민화를 그릴 때 오방색의 균형을 의식합니다. 한 색이 너무 강하면 다른 색으로 균형을 잡습니다. 그게 의식적이든 아니든 오방색 체계 안에서 색을 고르게 됩니다. 오래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감각입니다.
오간색이라는 것도 있다
오방색 사이사이에 오간색이 있습니다.
청과 황 사이의 녹색, 적과 백 사이의 홍색, 청과 백 사이의 벽색, 흑과 적 사이의 자색, 황과 흑 사이의 유황색. 오방색이 기본 다섯 색이라면 오간색은 그 사이를 채우는 색입니다.
민화에서 색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오간색 때문입니다. 기본 오방색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색감을 오간색이 채웁니다. 연화도에서 연꽃의 그러데이션을 표현할 때, 화조도에서 꽃잎 색을 올릴 때 이 감각이 필요합니다.
색을 쓰는 것이 세계관을 쓰는 것
민화를 오래 그리다 보면 색을 고르는 게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색을 쓰느냐가 어떤 기운을 담느냐와 연결됩니다. 봄의 새싹 같은 청색인지, 여름의 열기 같은 적색인지, 가을의 단단함 같은 백색인지. 계절이 담기고 방향이 담기고 의미가 담깁니다.
어르신들이 맨날 오행 따지고 오색 따지고 방향 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게 민화를 그리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복잡하고 번거롭게 느껴졌는데, 이 체계를 알고 나서 민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색 하나에 동쪽이 있고, 봄이 있고, 시작이 있습니다. 그게 민화 색이 단순히 예쁜 것을 넘어서는 이유입니다.
[관련 글 더 보기]
민화는 왜 길상화인가 -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마음을 담게 됐다
약사도란? 관음도 공부하다 발견한 그림 - 치유의 부처가 있다는 것
칠성도란? 처음엔 산신도인 줄 알았다 - 별을 신격화한 그림이 있다는 것
장생도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민화 — 부모님 생각이 나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