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자를 그림으로 그린다는 게 가능할까요?
민화를 배우기 전까지 저도 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문자도를 처음 접한 순간, 그 질문의 답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글자의 획 안에 꽃이 피어있고, 새가 앉아 있고,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글자인데 그림이고, 그림인데 글자였습니다.
그게 문자도입니다.
문자도란 무엇인가
문자도는 글자를 그림처럼 표현한 민화입니다. 글자의 획 안에 꽃, 새, 물고기, 생활 도구 같은 소재를 넣어 글자의 뜻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그림입니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글자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이렇게 여덟 가지 유교 덕목입니다. 가족과 사회 안에서 지켜야 할 기본 가치들입니다. 이 글자들을 집 안에 걸어두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습니다.
말로 훈계하는 대신 그림으로 보여주는 방식. 지금 생각해도 꽤 영리한 교육 방법입니다.
각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나
문자도의 재미는 글자 안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글자마다 그 뜻에 맞는 상징 그림이 들어있습니다.
효(孝) 자 안에는 부모를 공경하는 장면이나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 그려집니다. 충(忠) 자 안에는 용이나 무기처럼 강직함을 상징하는 소재가 들어갑니다. 신(信) 자에는 편지나 물고기가 들어가 약속과 믿음을 표현합니다. 의(義) 자에는 저울이나 바른 자세의 인물이 들어가 올바름을 강조합니다.
글자를 알면 뜻이 보이고, 그림을 보면 글자를 몰라도 느낌이 전달됩니다. 문자도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효(孝) 자를 직접 그려보니
처음으로 효 자를 그렸을 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획 안에 그림을 넣어야 하는데, 획이 너무 좁으면 그림이 답답해 보이고, 너무 크게 그리면 글자 형태가 무너집니다. 글자와 그림의 비율을 맞추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효 자 안에 무엇을 넣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의외로 깊었습니다. 부모님 생각이 자연스럽게 났습니다. 내가 지금 부모님께 잘하고 있나,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를 얼마나 안 했나. 글자 하나를 그리는데 그런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민화를 그린다는 게 단순히 붓질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문자도에서 처음 제대로 느꼈습니다.
병풍으로 만들어진 이유
문자도는 단독 그림으로도 사용됐지만, 여덟 글자를 한 세트로 구성한 병풍 형태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여덟 가지 덕목을 따로따로 보는 게 아니라 한눈에 펼쳐보게 한 것입니다. 집 안에 병풍으로 펼쳐진 문자도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교훈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사랑방에도, 안방에도, 아이 방에도 걸렸습니다.
해외 전시를 다니면서 외국 관람객들이 문자도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걸 봤습니다. 글자를 모르는데도 그림이 아름답고, 그림 안에 뭔가 더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문자도가 언어를 넘어 전달되는 그림이라는 걸 그때 확실히 알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질문
효, 충, 신, 의. 조선 시대 덕목이라고 해서 지금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가족에게 잘하고 있는가. 약속을 지키고 있는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가.
문자도는 이 질문들을 글자와 그림으로 눈앞에 펼쳐놓습니다. 말로 듣는 것보다 그림으로 매일 보는 것이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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