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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속 물 표현 - 파란 폭포 만들었다가 다시 덮은 이야기

by mybottari 2026. 4. 10.

 

민화에서 물을 그리다 두 번 크게 실패했습니다.

한 번은 일월오봉도 폭포에서. 한 번은 화조도 물결에서. 둘 다 방향은 달랐는데 결과는 비슷했습니다. 다시 덮고 다시 그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민화에서 물이 상징하는 것

물은 민화에서 생명력과 풍요를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 막혀도 돌아가고 아래로 내려가고 결국 바다에 닿는 물. 그 흐름이 삶의 지속을 상징합니다. 일월오봉도에서 폭포와 물결이 아래에 배치되는 이유입니다. 왕조가 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해도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공간이 물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상징하는 물고기가 사는 곳. 물이 있어야 물고기가 살고, 물고기가 있어야 풍요가 옵니다.

연화도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공간도 물입니다. 진흙 속 물에서 피어나는 연꽃. 물이 연꽃의 탄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음양 체계에서 물은 음(陰)입니다. 바위가 양(陽)이라면 물은 음.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균형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민화에서 바위와 물은 자주 함께 등장합니다.

 

폭포가 파란 물이 된 날

일월오봉도 폭포를 그릴 때였습니다.

호분으로 폭포를 깔끔하게 칠했습니다. 흰 폭포. 거기에 미감으로 바림을 넣으려고 했습니다. 물에 깊이를 주려면 바림이 필요합니다. 그냥 흰색만 있으면 밋밋합니다.

그런데 미감 색을 너무 진하게 올렸습니다. 바림을 넣는 순간 폭포가 파란 물이 됐습니다. 흰 폭포가 아니라 파란 폭포. 일월오봉도에 파란 폭포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호분으로 덮었습니다. 파란 물 위에 호분을 올리는 작업. 완전히 덮이지 않아서 여러 번 올려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미감으로 바림을 넣는데 이번엔 훨씬 연하게. 아주 조금만 올렸습니다.

미감 바림은 정말 조금만 넣어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티가 날 듯 말 듯 하게. 그게 폭포에 깊이를 주면서도 흰 폭포의 느낌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물결 간격이 안 맞던 날

화조도를 그릴 때 물결 표현이 문제였습니다.

원앙이 있는 화조도에는 물결이 들어갑니다. 살랑살랑 퍼지는 잔물결. 그 흐름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물결은 일정한 간격으로 퍼져나가야 합니다. 동심원처럼 바깥으로 퍼지는 흐름.

그런데 구불구불하게 그렸더니 이상해졌습니다. 물결이 살랑살랑이 아니라 울렁울렁이 됐습니다. 간격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어느 부분은 촘촘하고 어느 부분은 넓었습니다.

물로 지웠습니다. 아직 마르기 전이라 물붓으로 살살 지울 수 있었습니다. 다시 그렸습니다. 이번엔 간격을 의식하면서 천천히. 물결 하나 그을 때마다 앞 물결과의 간격을 확인하면서.

 

물 표현에서 중요한 것

물은 힘을 빼야 합니다.

폭포는 흘러내리는 방향이 일정해야 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선이 떨리거나 방향이 흔들리면 폭포가 아니라 그냥 흰 줄기가 됩니다. 붓을 일정한 속도로 내려긋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물결은 간격이 생명입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퍼져나가는 물결. 그 리듬이 살아야 물이 흐르는 느낌이 납니다. 간격이 불규칙하면 물결이 아니라 그냥 구불구불한 선이 됩니다.

색은 연하게. 파란 폭포를 만든 이후로 물에 색을 올릴 때 항상 조심합니다. 물은 투명합니다. 색이 너무 강하면 물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됩니다.

 

물이 있으면 그림이 살아난다

물이 들어간 그림은 생동감이 다릅니다.

정지된 그림에 흐름이 생깁니다. 폭포가 흘러내리고, 물결이 퍼져나가고, 물고기가 헤엄칩니다. 그 움직임이 화면 안에 시간을 만듭니다.

파란 폭포 만들었다가 덮고, 물결 이상해져서 지우고 다시 그리고. 그 과정이 있어서 지금은 물 표현이 조금 수월해졌습니다. 아직도 물결 간격은 긴장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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