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화를 그리다 보면 긴장되는 소재가 있고 여유로운 소재가 있습니다.
학 흰색 표현은 긴장됩니다. 소나무 밑색 경계는 긴장됩니다. 해와 달 원은 찌그러질까봐 긴장됩니다. 그런데 구름은 달랐습니다. 장생도를 그리면서 구름을 처음 제대로 그렸을 때 생각했습니다. 아 이건 좀 만만하다고.
구름이니까 약간 어긋나도 괜찮습니다. 모양이 찌그러져도 구름이니까~ 하고 넘길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완벽하게 동그란 구름은 없으니까요. 그 여유가 구름을 그리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민화에서 구름이 상징하는 것
구름은 민화에서 거의 모든 그림에 등장합니다.
운룡도에서 용이 구름 사이를 헤엄치고, 봉황도에서 봉황이 구름 위를 납니다. 십장생도에서 구름은 장수 소재 중 하나로 들어가고, 신선도에서 구름은 신선 세계의 경계를 만듭니다. 칠성도에서 구름은 하늘 전체가 신성한 공간이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운의 흐름입니다. 구름은 바람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이 기운의 흐름을 상징합니다. 용과 구름이 함께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용은 구름을 타고 기운을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는 신성한 공간의 표시입니다. 구름 위는 인간 세계가 아닙니다. 신선이 사는 곳, 신수가 머무는 곳. 구름이 있으면 그 공간이 현실과 다른 세계라는 신호가 됩니다. 신선도에서 하늘을 노랗고 파랗게 칠하고 구름을 넣는 이유입니다.
세 번째는 장수입니다. 십장생 열 가지 중 구름이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구름은 하늘에 영원히 있습니다. 형태는 바뀌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영속성이 장수를 상징합니다.
노을 색 구름이 제일 예쁘다
구름을 그릴 때 색이 재미있습니다.
흰 구름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민화에서 구름은 다양한 색으로 표현됩니다. 노을빛 구름, 붉은 구름, 보랏빛 구름. 특히 노을 색으로 물드는 구름이 제일 좋습니다.
노을 색 바림을 넣을 때 내 눈에 보이던 그 색이 있습니다. 해가 질 때 하늘이 주황에서 분홍으로, 분홍에서 보라로 넘어가는 그 색. 구름에 그 색을 넣으면 화면이 확 살아납니다. 다른 소재들은 상징에 맞는 색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데, 구름은 내가 기억하는 하늘 색을 그대로 쓸 수 있어서 더 수월했습니다.
바림 넣는 것도 구름에서는 자연스럽습니다. 경계가 흐릿해도 구름이니까 괜찮습니다. 소나무 밑색처럼 경계를 풀어야 한다는 부담이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번지게 두면 됩니다.
구름 모양 잡는 법
구름은 모양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민화 구름에는 특유의 형태가 있습니다. 뭉게뭉게 올라오는 형태, 흘러가는 형태, 소용돌이치는 형태. 용과 함께 그릴 때는 역동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어울립니다. 신선도 배경에는 느긋하게 흘러가는 구름이 어울립니다.
구름이니까 찌그러져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그리면 안 됩니다. 전체 흐름이 있어야 합니다. 구름 하나하나가 화면 안에서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뭉쳐있으면 구름이 아니라 솜뭉치 모음이 됩니다.
구름이 있으면 그림이 완성된다
구름이 배경에 들어가면 그림 전체가 달라집니다.
구름이 없으면 배경이 비어 보입니다. 구름이 들어가면 공간이 채워지면서 그림에 깊이가 생깁니다. 소나무가 그림의 기둥이라면 구름은 그림의 공기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없으면 허전합니다.
장생도를 그릴 때 구름이 만만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구름은 그림을 받쳐주는 소재입니다. 주인공이 되기보다 배경이 되는 소재. 그래서 완벽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름이니까~ 하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됩니다.
민화에서 유일하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소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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