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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도란? 털 치다가 붓 다 날린 그림 - 애증의 호피도

by mybottari 2026. 2. 12.

호피도 - 이미지 출처: 국립 중앙박물관, 공공누리 제1유형

 

호피도는 저한테 애증의 그림입니다.

공모전 출품작으로 호피도를 그렸을 때 털을 치다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화판 가득 세필붓으로 털을 하나하나 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팔이 아프고 눈이 침침하고 집중이 한계에 오는 그 느낌. 호피도 작업 중간에 진심으로 '이걸 왜 선택했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완성하면 또 뿌듯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호피도란 무엇인가

호피도는 호랑이를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호랑이 가죽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민화에는 이미 호랑이를 직접 그린 그림들이 있습니다. 호작도도 있고 맹호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가죽을 따로 그렸다는 건 전달하려는 의미가 달랐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호랑이는 위협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입니다. 그런데 가죽은 다릅니다. 이미 사냥이 끝난 결과물입니다. 그 강함을 인간이 제압하고 소유했다는 증거입니다. 호피도는 강한 존재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강함을 내가 다스리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털 치기의 세계

호피도 작업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털 표현입니다.

호랑이 가죽 특유의 질감을 표현하려면 세필붓으로 털을 하나하나 쳐야 합니다. 화판 가득. 한 올 한 올. 끝도 없이. 털의 방향도 일정해야 하고, 길이와 굵기도 자연스럽게 변해야 합니다. 너무 규칙적이면 인공적으로 보이고, 너무 불규칙하면 지저분합니다.

처음에는 붓질 방법을 몰라서 털을 잘못 쳤습니다. 힘 조절이 안 돼서 붓 끝이 뭉툭하게 눌려버리는 겁니다. 세필붓은 끝이 날카로워야 하는데 털 치다가 붓 여러 개를 다 망쳤습니다. 새 세필붓을 여러 자루 다시 사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붓을 버리면서 드는 감정이 묘했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내 탓이기도 하고.

 

호피 문양의 의미

호피 문양을 그리다 보면 왜 이게 권위의 상징이 됐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검은 줄무늬와 황갈색 바탕의 대비. 이게 단순한 패턴이 아닙니다. 보는 순간 뭔가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시각적 언어입니다. 규칙적이면서도 거칠고, 질서와 야성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완전히 길들여진 힘이 아니라 여전히 강함을 유지하고 있는 힘.

실제로 호피는 조선 시대에 매우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호랑이 사냥 자체가 어려웠고, 아무나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호피는 자연스럽게 권위의 상징이 됐습니다. 집 안에 호피도를 건다는 건 이 집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힘이 있다는 무언의 선언이었습니다.

그걸 붓으로 하나하나 표현하고 있으면 작업 중에 묘한 기분이 듭니다. 내가 지금 권위를 만들고 있구나 하는 느낌.

 

공모전 시리즈로 그린 이유

호피도를 공모전 시리즈 작품으로 선택한 건 도전이었습니다.

화판 가득 털을 치는 작업 규모가 크고, 기술적으로도 까다롭기 때문에 공모전 출품작으로는 확실히 눈에 띄는 소재였습니다. 쉽게 선택하는 소재가 아니니까 제대로 완성했을 때 임팩트가 있었습니다.

완성하고 나서 그림을 처음 펼쳤을 때 기억이 납니다. 털 하나하나가 빽빽하게 채워진 화판을 보면서 이걸 내가 다 그렸구나 싶었습니다. 뿌듯함이 올라오는 그 순간은 작업 중 힘들었던 것들을 다 잊게 만듭니다. 그래서 애증입니다. 다시 하라고 하면 하기 싫은데, 하고 나면 또 하고 싶어집니다.

 

호피도가 민화에서 특별한 이유

호피도는 다른 민화들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모란도나 화조도처럼 화사하지 않습니다. 호작도처럼 해학적이지도 않습니다. 호피도는 묵직합니다. 보고 있으면 편안하다기보다 단단하다는 느낌이 먼저 옵니다.

복을 기원하는 그림들이 더 잘되고 싶다는 욕망을 담는다면, 호피도는 무너지지 않고 싶다는 절실함을 담습니다. 민화가 밝고 경쾌한 그림만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받아내는 그림이기도 하다는 걸 호피도에서 배웠습니다.

털 하나하나를 치면서 그 무게를 손으로 만드는 작업. 다시 하라고 하면 진짜 하기 싫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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