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군자란? 매화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 - 여백을 남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by mybottari 2026. 2. 11.

사군자도 - 이미지 출처: 국립 중앙박물관, 공공누리 제1유형

 

사군자 중에 뭘 제일 좋아하냐고 물으면 저는 매화라고 대답합니다.

난초도 좋고 대나무도 좋은데, 매화는 뭔가 특별합니다. 아직 겨울인데 피어나는 꽃. 다른 꽃들이 전부 잠들어 있을 때 혼자 나와 있는 존재. 그 고집스러움이 마음에 듭니다. 민화를 10년 그리면서 계절마다 매화를 그렸는데 그릴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런데 사군자를 그리면서 가장 어렵다고 느낀 건 꽃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여백이었습니다.

 

사군자란 무엇인가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이 네 가지 식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사군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군자는 그냥 식물 네 종류를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각각의 식물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매화는 절개와 인내, 난초는 고결함, 국화는 절제, 대나무는 강직함과 겸손. 이 네 가지가 모이면 하나의 균형 잡힌 인간상이 완성됩니다.

박쥐도나 백동자도처럼 복을 기원하는 그림과는 결이 다릅니다. 사군자는 복을 부르는 그림이 아니라, 복이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그림입니다. 태도를 먼저 묻는 그림입니다.

 

매화를 제일 좋아하는 이유

사군자 네 가지를 전부 그려봤는데 저는 여전히 매화가 제일 좋습니다.

매화는 겨울에 핍니다. 다른 꽃들이 봄을 기다리는 동안 혼자 나옵니다. 추위를 이기고 피는 것이 아니라, 추위 속에서 피는 꽃입니다.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극복이 아니라 공존입니다. 힘든 상황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피어나는 것.

민화를 그리다 보면 잘 안 풀리는 날이 있습니다. 색이 탁해지거나, 선이 자꾸 흔들리거나, 그림 전체가 마음에 안 드는 날. 그런 날 매화를 그리면 좀 나아집니다. 추운 날에 피는 꽃을 그리고 있으면, 지금 이 답답한 상황도 어떻게든 된다는 기분이 드거든요. 그게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국화 꽃술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사군자 중에 가장 애먹은 건 국화입니다. 정확히는 국화 꽃술입니다.

국화 꽃잎은 그나마 괜찮습니다. 길쭉한 꽃잎이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지는 구조라 어느 정도 규칙이 있습니다. 문제는 꽃술입니다. 국화 중심의 동그란 꽃술 부분이 너무 작으면 밋밋해 보이고, 너무 강조하면 이상해 보입니다.

꽃술의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도 까다롭습니다. 작은 점들이 모여서 둥근 형태를 이루는데, 이게 너무 규칙적이면 기계적으로 보이고 너무 불규칙하면 지저분합니다. 자연스러운 불규칙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말은 쉽고 손은 어렵습니다.

국화를 제대로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지금도 국화를 그리기 전에는 꽃술부터 연습합니다.

 

여백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사군자를 처음 배울 때 여백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군자는 여백을 중요시하는 그림이라고.

처음엔 그게 쉬운 줄 알았습니다. 덜 그리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여백을 남기는 게 가득 채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뭔가를 그리다 보면 자꾸 더 넣고 싶어집니다. 여기 가지 하나 더, 저기 꽃 하나 더. 비어있는 공간이 허전하게 느껴지거든요. 그 충동을 이겨내야 합니다. 여백을 지키는 것은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요즘 전시에 나가는 창작민화를 보면 여백이 많지 않습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구성이 주를 이룹니다. 보기에 화려하고 눈에 잘 들어옵니다. 관람객 반응도 좋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여백을 줄이게 되는 경향이 생깁니다.

그게 좀 고민입니다. 전통 사군자의 여백과 현대 창작민화의 화려함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데, 그 균형점이 어디인지 아직도 그릴 때마다 생각합니다.

 

여백이 만드는 것

사군자에서 여백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매화 가지 하나가 화면 한쪽에 있고 나머지는 비어있을 때, 그 빈 공간에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들어옵니다. 눈이 내릴 것 같은 느낌, 바람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느낌. 그림이 표현하지 않은 것을 보는 사람이 채웁니다.

색채도 절제됩니다. 화려한 민화들과 달리 사군자는 먹의 농담이나 제한된 색으로 그립니다. 처음에는 심심해 보였는데, 오래 보면 오래 볼수록 의미가 깊어집니다. 즉각적으로 화려한 그림은 처음에 눈을 잡지만, 사군자는 천천히 마음을 잡습니다.

요즘 전시에서 사군자를 걸면 다른 그림들에 비해 조용하게 있습니다. 화려한 그림들 사이에서 눈에 덜 띕니다. 그런데 가끔 그 앞에서 오래 서 있는 관람객을 봅니다. 다른 그림은 지나쳤는데 사군자 앞에서 멈추는 사람들. 그걸 볼 때마다 여백을 지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군자가 계속 그리고 싶은 이유

사군자는 민화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계속 그리는 소재입니다.

매화를 그릴 때마다, 국화 꽃술을 다시 연습할 때마다, 대나무의 곧은 줄기를 그을 때마다 뭔가를 배웁니다. 기술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절제하는 것, 비우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이 가르치는 게 있습니다. 사군자는 특히 그렇습니다. 여백을 남기는 연습을 하다 보면 삶에서도 뭔가를 덜어내는 감각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다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비어있는 것이 부족한 게 아니라는 것.

매화가 겨울에 피는 것처럼, 사군자는 복잡한 세상에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그림입니다.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Mybott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