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류도를 처음 그렸을 때 색을 완전히 망쳤습니다.
석류 하면 선명하고 투명한 붉은색입니다. 석류 알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색감. 그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결과물은 칙칙하고 탁한 갈색에 가까운 뭔가가 나왔습니다. 고동바림을 너무 진하게 넣어버린 겁니다.
민화에서 고동색은 그림자와 깊이를 만드는 데 씁니다. 그런데 석류에 고동을 너무 강하게 올리면 어떻게 되냐면, 석류 특유의 맑고 투명한 느낌이 완전히 죽어버립니다. 그 선명한 빨간색이 사라지고 뭔가 오래된 것 같은 탁한 색이 됩니다. 그날 그림을 보면서 한참 멍했습니다.
석류도란 무엇인가
석류도는 석류를 소재로 그린 민화입니다. 다산과 번성을 상징하는 길상화입니다.
석류가 왜 다산의 상징이 됐는지는 열매를 쪼개보면 바로 이해가 됩니다. 겉은 단단한 껍질인데 안을 열면 붉은 씨앗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그 수많은 씨앗이 한눈에 자손의 번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자연물의 형태에서 상징을 읽어냈는데, 석류는 그 상징이 가장 직관적으로 보이는 과일입니다.
껍질이 벌어지며 씨앗이 드러나는 모습도 중요합니다. 닫혀 있던 것이 열리면서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는 장면. 그래서 석류도는 혼례나 출산과 관련된 자리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석류 색을 살리는 게 왜 어려운가
다시 색 이야기로 돌아오면, 석류는 민화 소재 중에서 색 표현이 까다로운 편입니다.
석류 알의 색은 단순한 빨강이 아닙니다. 투명한 느낌이 있습니다. 빛을 머금은 것 같은 맑고 선명한 빨강입니다. 이걸 표현하려면 색을 밝게 유지하면서도 입체감을 줘야 합니다.
문제는 입체감을 주려고 그늘 부분에 고동을 올리다가 손이 과해지면 그 순간 색이 죽는다는 겁니다. 고동이 퍼지면서 맑은 빨강을 잡아먹어버립니다. 제가 딱 그 실수를 했습니다. 입체감 욕심에 고동을 너무 많이 올렸고, 석류 알이 전부 칙칙하게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석류 색을 살리려면 고동을 극도로 절제해야 합니다. 아주 살짝, 정말 필요한 부분에만. 그리고 빨간 분채를 여러 겹 쌓아서 깊이를 만드는 방식이 훨씬 낫습니다. 이걸 그 망한 그림 덕에 배웠습니다.
껍질 표현도 따로 공부했다
석류도에서 알만큼 중요한 게 껍질입니다.
석류 껍질은 거칠고 울퉁불퉁합니다. 그 질감을 표현하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는 과정입니다. 매끄러운 도자기나 과일과 달리 껍질에는 요철이 있고, 그 요철마다 빛과 그늘이 달라집니다.
껍질 색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노란 기운, 주황 기운, 붉은 기운이 섞여 있습니다. 이 색들을 층층이 올리면서 석류 껍질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깊은 색감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냥 주황색으로 칠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러면 너무 평평해 보입니다.
반쪼개진 석류가 어려운 이유
석류도에는 온전한 열매와 쪼개진 열매가 함께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쪼개진 석류를 그릴 때가 가장 어렵습니다. 붉은 씨앗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단면을 표현해야 하는데, 씨앗 하나하나를 다 그리면 너무 복잡해 보이고, 대충 표현하면 석류 같지 않습니다. 씨앗들의 밀도감을 살리면서도 전체가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균형을 찾는 게 핵심입니다.
그리고 씨앗의 색도 전부 같은 빨강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씨앗은 진하고 선명하게, 뒤로 갈수록 연하고 어둡게. 이 작은 차이들이 쌓여야 진짜 석류 단면처럼 보입니다.
색을 망하고 나서 알게 된 것
그날 색 망한 석류도를 버리지 않고 옆에 뒀습니다.
나중에 다시 그린 석류도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봤는데, 뭐가 달라졌는지 눈에 확 보였습니다. 고동의 양, 색을 쌓는 순서, 밝은 부분을 어디까지 유지하느냐. 실패한 그림이 가장 좋은 교재가 됐습니다.
민화를 오래 그리면서 느낀 건데, 잘 된 그림보다 망한 그림에서 더 많이 배웁니다. 왜 망했는지를 알면 다음번엔 그 실수를 안 하게 되니까요. 석류 색을 망쳤던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 석류를 이렇게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