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초충도를 봤을 때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됐습니다.
민화에 풀이랑 벌레라니. 호랑이도 있고 봉황도 있고 모란도 있는데, 왜 하필 벌레입니까.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가 유명하다는 건 알았는데 왜 유명한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그림이고, 섬세하게 잘 그렸네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민화를 10년 그리면서도 초충도는 한참 안 그렸습니다. 별로 끌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마당에서
생각이 바뀐 건 그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름 어느 날 마당을 보다가 풀잎에 앉은 나비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햇빛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걸 보고 있다가, 문득 이게 초충도구나 싶었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거구나.
그때 처음으로 초충도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대단한 소재를 그린 게 아니라 그냥 이 순간을 그린 거였습니다. 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냥 지나치면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작은 것을 주인공으로
초충도가 독특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민화 대부분은 뭔가 강하거나 화려하거나 상징이 분명한 소재를 씁니다. 호랑이, 용, 봉황, 모란. 초충도는 반대입니다. 풀이랑 벌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들을 화면 한가운데 데려다 놓습니다.
이게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시선이었을 겁니다. 작고 미미한 존재도 자연의 질서 안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 하찮아 보여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것. 초충도는 그 시선을 담은 그림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상은 크고 화려한 것에 주목했을 겁니다. 그 시대에 풀벌레를 정성껏 그렸다는 게 단순한 그림 실력 과시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충도를 직접 그려보면
초충도를 처음 그릴 때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서 당황했습니다.
벌레는 작습니다. 작은 만큼 선 하나가 더 중요합니다. 더듬이 한 가닥, 다리 하나의 굵기와 방향이 살아있는 벌레처럼 보이느냐 아니냐를 결정합니다. 나비 날개의 무늬도 세밀하게 표현해야 하는데 너무 강하게 그리면 무겁고, 너무 약하면 흐릿합니다.
풀도 쉽지 않습니다. 그냥 초록색으로 칠하면 되겠지 싶은데, 잎맥의 방향과 빛의 흐름에 따라 색을 달리 올려야 살아있는 풀처럼 보입니다. 풀 한 포기에 이렇게 공이 들어간다는 걸 그려보기 전엔 몰랐습니다.
초충도를 그리면서 작은 것을 제대로 보는 훈련이 됐습니다. 민화 전체 실력이 올라가는 데 초충도가 은근히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나비, 벌, 개미가 담고 있는 것
초충도에 등장하는 벌레들에도 각자 의미가 있습니다.
나비는 변화와 재생을 상징합니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날아오르는 과정이 고난 끝에 도약하는 삶과 닮았습니다. 벌과 개미는 부지런함과 성실함의 상징입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결실을 향해 노력하는 태도를 담고 있습니다.
풀도 마찬가지입니다. 밟히고 꺾여도 다시 자라나는 풀의 생명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상징합니다. 이걸 알고 나서 초충도가 그냥 자연 그림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됩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왜 유명한지, 이제는 압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도 있지만, 그보다 그 시선이 대단한 겁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들을 정성껏 들여다보고 그림으로 남긴 것. 풀벌레 하나에도 삶의 이치가 담겨 있다고 본 것.
민화를 오래 그리다 보면 작은 소재에 더 눈이 가게 됩니다. 크고 화려한 것보다 작고 소박한 것이 더 오래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충도가 바로 그런 그림입니다. 처음엔 왜 유명한지 몰랐는데, 지금은 왜 오래 사랑받는지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