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기명절지도를 배정받았을 때 속으로 좀 실망했습니다.
전시를 앞두고 선생님이 소재를 나눠주셨는데 제 차례에 기명절지도가 왔습니다. 옆 사람은 봉황도, 또 옆 사람은 화조도. 근데 나는 그릇이랑 과일이라니. 그냥 정물화잖아요. 민화인데 왜 이걸 그려야 하지 싶었습니다. 예쁠 것 같지도 않았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제가 기명절지도를 몰랐던 겁니다.
기명절지도가 뭔지는 알았는데
기명절지도는 그릇, 문방구, 과일, 꽃 같은 생활용품을 책장이나 선반 위에 배치해서 그린 민화입니다. 기명(器皿)은 그릇과 도구, 절지(折枝)는 꺾은 가지나 꽃을 뜻합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이 그림을 집 안에 걸어두며 학문과 풍요, 삶의 안정을 기원했습니다. 책가도와 비슷한 맥락인데, 책가도가 책 위주라면 기명절지도는 더 다양한 생활 소재가 들어갑니다. 도자기, 향로, 붓, 벼루, 복숭아, 석류. 일상의 물건들이 화면 안에 가득합니다.
의미도 알고, 구성도 이해했는데 그래도 처음엔 솔직히 별로였습니다. 뭔가 화려한 걸 그리고 싶었거든요.
근데 색을 쌓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시작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정확히는 분채를 쌓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민화에서 쓰는 분채는 겹겹이 올릴수록 색이 달라집니다. 한 번 칠했을 때는 그냥 평범한 색인데, 두 번 세 번 쌓으면 안쪽에서 뭔가 빛이 나는 것 같은 오묘한 색감이 나옵니다. 도자기의 흰 면에 분채를 쌓아가면서 청자 같은 깊이가 생기고, 과일 위에 색을 겹치면서 진짜 익은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명절지도가 이렇게 매력적인 그림이 될 줄 몰랐습니다.
분채 위에 분채를 쌓는다는 것
기명절지도의 진짜 매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색의 깊이입니다.
화조도나 호작도는 선이 매력입니다. 용이나 봉황은 기세가 매력입니다. 기명절지도는 색이 매력입니다. 분채를 얼마나 섬세하게 쌓느냐가 그림의 완성도를 결정합니다.
도자기 하나를 예로 들면, 기본 흰색을 깔고 그늘지는 면에 연한 파란 기운을 올리고 또 그 위에 살짝 회색을 얹으면 청화백자의 느낌이 납니다. 그게 한 번에 칠해진 게 아니라 여러 층이 쌓인 결과라는 걸 모르면 어떻게 이런 색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보는 사람은 그냥 예쁘다고 하는데, 그 예쁨 안에 공정이 있습니다.
전시 날 제 기명절지도 앞에 사람들이 오래 서 있었습니다. 처음엔 별로라고 생각했던 그림 앞에서요. 그때 좀 우쭐했습니다. 솔직히.
그릇 하나에 담긴 의미
나중에 기명절지도의 의미를 제대로 공부하면서 이 그림이 더 좋아졌습니다.
화면 안에 들어가는 소재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습니다. 도자기는 재물을 담는 그릇이자 가정의 안정을 상징합니다. 붓과 벼루는 학문과 성공의 바람입니다. 복숭아는 장수, 석류는 다산. 꽃은 계절의 풍요를 담습니다.
그냥 예쁘게 배치한 정물화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바라는 것들을 선반 위에 올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어떤 소재를 넣을지 선택하는 것 자체가 그리는 사람의 소망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걸 알고 나서 기명절지도를 그릴 때 소재 선택을 훨씬 신중하게 하게 됐습니다.
강제 배정이 가르쳐준 것
선생님이 기명절지도를 억지로 배정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이 그림을 한참 뒤에야 그렸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영영 안 그렸을 수도 있고요.
민화를 10년 그리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처음에 별로라고 생각한 소재가 나중에 가장 좋아하는 소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파초도도 그랬고, 기명절지도도 그랬습니다. 겉만 보고 판단하면 놓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명절지도는 이제 제가 가장 즐겨 그리는 소재 중 하나가 됐습니다. 색을 쌓는 재미, 소재를 고르는 재미, 완성됐을 때 나오는 오묘한 색감. 전시 강제 배정 덕분에 알게 된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