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노안도를 그려드렸습니다.
장수 그림으로 십장생도를 그려드릴까 하다가 노안도를 선택했습니다. 십장생도는 웅장하고 힘찬 느낌인데, 두 분께 드리고 싶은 마음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오래 사세요보다는 편안하게 사세요에 가까웠습니다. 그 마음을 담기에 노안도가 딱이었습니다.
제목에 숨겨진 장치
노안도를 처음 배울 때 제목 이야기를 듣고 감탄했습니다.
노안(蘆雁)은 갈대와 기러기입니다. 그런데 발음이 노안(老安)과 똑같습니다. 늙어서 편안하다. 그림 제목 자체가 이미 소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박쥐가 복(蝠)과 복(福)의 발음이 같아서 복의 상징이 된 것처럼, 노안도도 갈대와 기러기를 그렸지만 그림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평안한 노후가 떠오르도록 만든 그림입니다. 조선 사람들의 언어 감각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갈대밭에 내려앉은 기러기
노안도는 가을 그림입니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기러기가 물가에 내려앉아 쉬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기러기가 아닙니다. 머물고 있는 기러기입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기러기는 철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새입니다. 그런데 노안도 속 기러기는 잠시 내려앉아 쉽니다.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사람이 삶의 후반에 맞이하는 휴식. 더 이상 어딘가를 향해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 노안도는 그 순간을 담은 그림입니다.
부모님께 그림을 드리면서 이 이야기를 해드렸더니, 어머니가 한참 그림을 바라보셨습니다. 아무 말씀 없이요. 그 침묵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기러기가 담는 두 가지 마음
기러기는 노안도에서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평안한 노후입니다. 앞서 말한 그 머묾의 이미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부의 화목입니다. 기러기는 한 번 맺은 짝을 평생 유지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혼례 의식에서 나무 기러기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노안도에 기러기 한 쌍이 함께 그려지면 오래도록 함께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는 뜻이 됩니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노안도를 선택한 이유가 이것이기도 했습니다. 장수 기원이면서 동시에 두 분이 오래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기러기 한 쌍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담아줬습니다.
십장생도와 다른 이유
장수 그림이라고 하면 보통 십장생도를 먼저 생각합니다. 노안도는 결이 다릅니다.
십장생도는 강합니다. 해, 산, 학, 소나무. 오래 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노안도는 부드럽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편안하게 사는 것. 수명의 길이보다 마음의 평온. 민화 중에서 가장 내면적인 바람을 담은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께,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 힘든 시간을 버텨온 분께. 노안도가 어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갈대를 그리는 감각
노안도를 그릴 때 갈대 표현이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뻣뻣하면 안 됩니다. 바람에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느낌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흐물거리면 갈대의 곧은 성질이 사라집니다. 곧으면서도 유연한 것. 그 균형이 갈대를 그리는 핵심입니다.
기러기도 날아가는 모습보다 앉아있는 모습이 훨씬 어렵습니다. 날개를 접은 자세, 물에 발을 담근 무게감. 쉬고 있는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 움직이는 생명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노안도를 완성하고 나면 다른 그림보다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그림 자체가 그런 감성을 담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는 사람도 잠시 쉬게 되는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