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호도를 처음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운룡도도 그려봤고 호작도도 수없이 그렸지만, 이 둘을 한 화면에 넣는 건 차원이 달랐습니다. 용은 곡선의 존재고 호랑이는 직선의 존재입니다. 이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조형 언어를 하나의 화면 안에서 싸우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스케치만 열 장 넘게 버렸습니다.
용과 호랑이, 왜 같이 있나
용호도에서 이 두 존재가 함께 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용은 하늘의 존재입니다. 상상의 동물이고, 비를 내리고 구름을 다스리며 보이지 않는 질서를 관장합니다. 호랑이는 땅의 존재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고, 잡귀를 쫓는 수호자이며 눈앞의 현실을 지키는 힘입니다.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눈에 보이는 세계. 이 둘이 한 화면에 마주한다는 것은 그 두 세계의 균형을 담는다는 뜻입니다. 그냥 강한 동물 둘을 나란히 그린 게 아닙니다.
위치에 담긴 의미
용호도를 구성할 때 가장 먼저 결정하는 것이 위치입니다.
용은 위, 호랑이는 아래. 용은 구름 속이나 화면 상단에, 호랑이는 바위나 땅에 자리 잡습니다. 하늘과 땅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존재는 서로를 바라봅니다. 용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호랑이가 위를 올려다보는 구도. 이 시선의 교환이 용호도의 핵심입니다.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서로를 인식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처음 구도를 잡을 때 이걸 몰랐습니다. 둘이 마주 보게 하면 되겠지 싶어서 그냥 배치했더니 뭔가 이상했습니다. 싸우는 그림처럼 보였거든요. 시선의 각도, 거리, 무게감. 이 모든 것이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걸 여러 번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됐습니다.
집을 지키는 두 가지 보호
용호도가 집 안의 중요한 위치에 걸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호랑이는 잡귀를 물리칩니다. 눈에 보이는 나쁜 기운, 외부의 위협을 막는 존재입니다. 용은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다스립니다. 집안의 기운과 흐름,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과 혼란을 정리하는 역할입니다.
호랑이가 바깥을 막는다면 용은 안의 질서를 잡습니다. 용호도 하나에 안팎이 모두 지켜지는 구조가 담겨 있습니다. 이걸 알고 나서 용호도를 그릴 때 마음가짐이 달라졌습니다. 그냥 멋진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보호의 의미를 담는 그림을 그리는 거니까요.
용호도를 그릴 때 가장 어려운 것
용과 호랑이는 붓질 자체가 다릅니다.
용은 유려한 곡선입니다. 몸이 구불구불 흘러야 하고 그 흐름에 기세가 담겨야 합니다. 붓을 부드럽게 이어가야 합니다. 반면 호랑이는 단단합니다. 근육의 긴장, 발의 무게감, 눈의 기세. 직선적이고 단호한 선이 필요합니다.
같은 화면에서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붓질을 오가야 합니다. 용을 그리다가 호랑이로 넘어갈 때 손의 감각을 바꿔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잘 안 됐습니다. 용 그리다가 호랑이 그리면 선이 너무 부드럽게 나오거나, 반대로 호랑이 그리다가 용으로 가면 선이 너무 딱딱했습니다.
이 전환이 자연스러워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용호도를 그리기 전에는 손풀기를 따로 합니다. 두 가지 선의 감각을 모두 깨워놓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균형이 무너지면 그림이 죽는다
처음 용호도를 완성했을 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용이 너무 화려했습니다. 비늘 하나하나에 공을 너무 들이다 보니 호랑이가 상대적으로 밋밋해 보였습니다. 균형이 무너진 거죠. 용이 주인공이고 호랑이가 조연처럼 보이는 그림이 돼버렸습니다.
반대 경우도 있었습니다. 호랑이를 강하게 그리니 용이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용호도에서 이 둘은 대등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압도하는 순간 그림의 의미가 흔들립니다.
지금도 용호도를 그릴 때 중간중간 그림을 멀리서 봅니다. 가까이서 보면 각 부분에 집중하게 되는데, 멀리서 봐야 두 존재의 균형이 보이거든요.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용호도 작업의 핵심입니다.
용호도가 말하는 것
용호도를 오래 그리면서 이 그림이 단순히 강함의 상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은 호랑이 없이는 현실을 지킬 수 없습니다. 호랑이는 용이 상징하는 질서 없이는 힘이 방향을 잃습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이상과 현실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안정된 세계가 됩니다.
그 균형을 화면 안에서 표현하는 것이 용호도를 그리는 일입니다. 기술적으로 어렵기도 하지만 의미 면에서도 무거운 그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용호도를 완성하면 다른 그림을 끝냈을 때와는 다른 뿌듯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