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민화 속 바위를 봤을 때 이해가 안 됐습니다.
바위면 검은색이거나 회색이거나 어두운 색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민화 속 바위는 청록색이고 밝은 색입니다. 저게 왜 바위야? 싶었습니다. 돌이 저런 색일 리가 없잖아.
그런데 직접 그려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민화에서 바위가 상징하는 것
바위는 민화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단단한 상징입니다.
오래된 바위는 수백 년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계절이 바뀌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변하지 않는 묵직함이 민화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이어집니다.
첫 번째는 장수입니다. 바위는 십장생 열 가지 중 하나입니다. 학, 사슴, 소나무, 거북과 함께 장수를 상징하는 소재입니다. 수백 년을 버티는 바위처럼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십장생도에서 바위는 대개 물가나 소나무 아래에 배치됩니다. 자연의 오랜 기반으로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안정과 기반입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그래서 바위가 있는 그림은 안정적인 삶,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일을 앞둔 사람에게 바위가 있는 그림이 선물로 쓰이는 이유입니다.
세 번째는 군자의 기개입니다. 바위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비바람에도 그 자리를 지킵니다. 이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선비의 기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사군자 그림 배경에 바위가 자주 등장합니다. 매화 옆에, 난초 옆에, 대나무 옆에 바위가 있습니다. 군자의 절개를 받쳐주는 존재입니다.
네 번째는 신성한 공간의 표시입니다. 수월관음도에서 관음이 바위 위에 앉아 있습니다. 물은 유연함, 바위는 견고함. 자비는 부드럽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산신도에서도 바위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산신이 머무는 공간, 신성한 기운이 깃든 자리. 바위가 그 공간을 표시합니다. 신선도에서도 신선이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위가 신성한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음양의 균형입니다. 민화에서 바위는 물과 함께 자주 등장합니다. 물은 유동적이고 부드럽습니다. 바위는 고정적이고 단단합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음양의 균형이 완성됩니다. 어해도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배경에 바위가 있는 이유입니다. 연화도에서 연꽃 옆에 바위가 자리 잡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이 함께 있어야 그림이 안정됩니다.
이렇게 보면 바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장수, 안정, 기개, 신성함, 균형. 민화에서 이 다섯 가지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소재가 바위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의미를 담은 바위가 처음 봤을 때 저게 왜 바위야? 싶은 청록색이라는 게 민화의 재미입니다.
왜 청록색 바위인가
민화 바위가 청록색이거나 밝은 색인 이유가 있습니다.
민화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상징을 담기 위해 색을 선택합니다. 검은색 바위는 무겁고 어둡습니다. 그 색이 화면에 들어오면 그림 전체가 가라앉습니다. 민화는 길상화입니다. 복을 부르는 그림. 어두운 색보다 밝은 색이 어울립니다.
청록색은 오방색에서 청(靑)과 연결됩니다. 생명력과 희망의 색. 바위에 그 색을 입히면 단단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존재가 됩니다. 현실의 바위 색이 아니라 민화가 원하는 바위의 기운을 표현한 색입니다.
처음엔 저게 왜 바위야? 싶었는데, 알고 나니 왜 저 색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직접 그려보니 바위가 예뻤다
직접 청록색 바위를 그려봤을 때 놀랐습니다.
색감이 확 살아났습니다. 꽃과 새가 있는 화면에 청록색 바위가 들어가니까 전체 색 균형이 잡혔습니다. 검은 바위였으면 무거웠을 자리가 청록색 바위로 가벼워졌습니다.
바림을 넣으면 더 예뻐집니다. 청록색 위에 진한 청록으로 바림을 넣으면 바위에 입체감이 생깁니다.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이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단순한 색 덩어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바위가 됩니다.
금먹 테두리가 완성시킨다
바위에 금먹으로 테두리 선을 올리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청록색 바위 위에 금먹 선이 올라가면 반짝반짝 빛납니다. 바위가 보석처럼 보입니다. 삼재부에서 금먹 바탕을 쓰면서 느꼈던 그 신성한 느낌이 바위에서도 납니다. 금먹 테두리 하나가 평범한 바위를 민화 속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바위 그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밝은 밑색을 깔고, 바림으로 입체감을 넣고, 마지막에 금먹으로 테두리를 올립니다. 이 세 단계가 완성되면 처음에 저게 왜 바위야? 싶었던 그 청록색 덩어리가 빛나는 바위가 됩니다.
바위가 있으면 그림이 안정된다
바위는 그림의 기반입니다.
구름이 그림의 공기라면, 바위는 그림의 땅입니다. 학이 서 있을 자리, 신선이 앉을 자리, 소나무가 뿌리를 내릴 자리. 바위가 그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바위가 없으면 다른 소재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엔 저게 왜 바위야? 싶었습니다. 지금은 바위가 없는 민화가 어색합니다. 청록색이고 금먹 테두리가 있고 바림이 들어간 그 바위. 민화에서만 볼 수 있는 바위입니다.